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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조언 / 애드거 앨랜 포의 조언 / 명언

에드거 앨랜 포

 

시련이 없는 것은

축복받은 적이 없다는 말과 같다.

 

- 에드거 앨랜 포 -

(1809.1.19 ~ 1849.10.7)


19세기 최대의 독창가로 꼽히는 미국의 시인·소설가·비평가. 단편《황금 풍뎅이》,《어셔가의 몰락》,《모르그가의 살인사건》,《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검은 고양이》,《도난당한 편지》등이 있음.

 

1809년 1월 19일 미국 보스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는 배우였으나 그가 3세가 되기 전에 사망하여 포는 리치먼드의 부유한 상인 존 앨런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곳에서 세례를 받고 에드가 앨런 포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일찍이 어머니를 잃은 포는 항상 이상적인 여성상을 추구하던 중, 14세 때 급우의 어머니인 젊고 아름다운 제인 스타나드로부터 그것을 발견하고 나중에 유명한 《헬렌에게》(1831)라는 추억의 시를 쓰게 되었다. 17세에 버지니아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양부로부터의 학비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무절제한 생활을 하여 1년도 못되어 퇴학당하였다. 그 이후 양부와의 불화와 화해라는 비참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감수성이 강하였던 그는 18세 때 《티무르 Tamerlane and Other Poem》(1827)를 보스턴에서 익명으로 출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비평도 받지 못하고, 생활이 궁한 나머지 변명()으로 군대에 들어가 한때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 적을 두기도 하였다. 그 동안에도 제2시집 《알 아라프, 티무르 Al Aaraaf, Tamerlane, and Minor Poems》(1829)를 볼티모어에서 출판하였으나 묵살당하였고, 제3시집 《포 시집 Poems by Edgar A.Poe》(1831)을 출판하기에 이르렀으나, 시작()을 단념하고 소설을 쓰기로 하였다.

1831년부터는 미망인인 숙모와 그의 딸 버지니아와 함께 볼티모어에 살면서 각종 잡지와 신문의 현상소설에 응모하였다. 1832년 《병 속의 수기() A MS. Found in a Bottle》가, 1843년에는 《황금 풍뎅이 The Gold Bug》가 당선, 이로부터 그의 단편의 전성시기가 찾아왔다. 1836년에는 14세밖에 되지 않은 버지니아와 결혼하였고, 각종 잡지의 편집자로 있으면서 단편을 계속 발표, 1840년 《리지아 Ligeia》(1838) 《어셔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839)을 포함한 《괴기 단편집()》(2권)을 간행하였다. 그 후 《모르그가()의 살인사건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1841) 《큰 소용돌이에 빨려들어서 A Descent into a Maelström》(1841) 《붉은 죽음의 가면() The Masque of the Red Death》(1842)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1845) 《도난당한 편지 The Purloined Letter》(1845) 등을 썼으며, 1845년에는 《황금 풍뎅이》를 포함해서 《단편집》을 출판하였다.

보들레르는 이들 단편을 읽고 놀라 “여기에는 내가 쓰고 싶었던 작품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하면서 평생을 포의 작품 번역에 바쳤다. 포는 《어셔가의 몰락》에서의 주인공처럼 현실에 등을 돌리고 내면의 심연에 끌리면서도, 한편으로 추리와 분석 능력을 활용하여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의 탐정 듀팡과 같은 인물을 창조하여 후세의 ‘셜록홈스’ 등 추리소설의 장르를 개척하였다.

단편작가 포의 불합리와 합리의 양면성은 시인으로서의 그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재()는 소설에서와 같이 우수를 내포한 로맨틱한 것이지만, 그것을 다룬 방법은 수학자와 같은 냉정함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전형은 《갈가마귀 The Raven》(1845)이다. 그의 담시()는 죽은 연인에 대한 끝없는 연민의 정에 차 있다. 그러나 이듬해의 《창작의 철리() The Philosophy of Composition》(1846)에서는 이 작품을 분석, 어느 어구도 주도면밀한 계산하에서 구사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시작의 태도는 말라르메를 비롯하여 발레리 등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으나, 포의 작품에는 단편이건 시이건 어딘가 내용과 방법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결점이 있다. 그 때문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비속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에 있어서 시는 회화 ·조각 ·건축 ·무용 ·음악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단편이나 시 작품도 그러한 의미에서는 구별이 없었다. 양자는 모두 미적 효과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작품이 긴 것은 효과의 통일을 기할 수 없다고 하여 부정하였다.

《어셔가의 몰락》은 산문으로 씌어진 시이고, 《갈가마귀》는 운문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시의 원리》(1850)에서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이다”라고 한 생각은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게 영향을 주어 산문시를 낳게 하였다. 또한, 시를 교훈이나 실용적인 도덕의 대용()으로 하는 것을 거부, 그 때문에 실용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당하였다. 1847년 가난 속에서 아내와 사별한 포는 스스로도 건강을 돌보지 않아 2년 후인 1849년 10월, 볼티모어의 노상에 쓰러져 의식불명인 채 40이라는 젊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도 오래도록 무시당하였으나, 1875년에야 겨우 그의 기념비가 세워지고, 말라르메는 “검은 재해()의 벌판에 떨어진 조용한 운석()”이라 노래한 소네트를 프랑스로부터 보내와 비참하였던 그의 생애를 애도하였다. 이후 포의 명예는 점차 회복되어, 19세기 최대의 독창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